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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vop.co.kr/2010/03/18/A00000286319.html

인터넷 동이' 장C의 무모한 도전

[만민보] 열린우리당원에서 민주노동당 당직자 된 장우식씨

김동현 기자 mailto@vop.co.kr
인터넷으로 세상을 만나고 세상에 뛰어들고,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 장C는 그런 사람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번져갈 때 언론들은 ‘인터넷으로 지식을 얻은 준전문가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평했다. 장C도 그랬다. 2000년대 한국사회 변화의 길목마다 ‘촛불’이 일었다. 그 자리에 장C가 있었다.

장C는 민주노동당 홍보부장이다. 장우식이라는 이름도 쓰지만, 인터넷에서는 장C로 불린다.

이 사람, 특이하다. 이력이 특이하다. 노사모 상근자에서 열린우리당 당원으로, 민주노동당 상근자로. 도통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력의 비밀은 뭘까.

장C의 고향은 대구다. 어린 시절 기억은 딱히 없다. 철물점을 했던 할아버지 덕에 이발소와 목욕탕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흑백 티비를 갖고 있었던 것 정도다.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사를 갔다. 친구들 사귀는 데 애를 썼던 기억 정도가 장C에게 남은 어린 시절이다. 아, 하나 있다면 서예학원에 다니려고 학원비를 타다가 한 번에 50원 하는 오락실에서 다 쓰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께 돌아가면서 비오는 날 먼지 날 정도로 맞았단다. 그 뒤로 장C는 게임에는 손도 안 댄다. 그 흔한 인터넷 고스톱도 치지 않는다. 그렇게 인터넷 좋아하는 사람이.

경북대 앞에서 복사집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이모가 운영하는 칠성시장 축산물 도매점에서 일했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줄곧 그 가게에서 일하신다. 이모는 은퇴했고 어머니와 장C의 동생이 가게를 운영한다. 장C 말로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가게다. 그 놈(!)의 대형마트 여파는 장C네도 피하가지 않았다. 도매 고객 외에는 고기를 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단다. 가게를 물려받기 위해 경영수업 중인 장C 동생의 푸념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고등학교 시절 기억도 별로 없다. 78년생 장C. 시대를 강타했던 '마지막승부'를 보며 농구장에서 살았고 서예 동아리에 빠져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경명여고 서예반 예쁜 여학생을 흠모해 봤지만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주변에 남자도 많아서...’ 수많은 골키퍼를 제치고 골을 넣을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상복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서예대회에서는 입선 말고 받은 상이 없다.

내신 시험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별로 없을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하필이면 장C가 다니던 학교에서 94년 수능 첫 해에 전국 수석이 나와 버렸다. “빡세게 공부시키는” 학교에 다녔지만 장C와는 그닥 인연이 없었다. 그래도 장C에게 수능은 ‘괜찮은’ 시험제도였다. “문제와 답안을 잘 맞춰보면”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많았다. 외우는 데 젬병이었지만 “통박을 굴리는 데”는 소질이 있었나 보다. 장C는 수능 100%로 신입생을 뽑는 학교에 지원했다.

테니스 부원 장C

테니스 부원 장C. 장C는 이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꽤 잘 생기고 몸매도 테니스로 다진 터라 단단해 보이네요. 근데 왜 여친이 없었을까요 ㅠ.ㅠ"ⓒ 장C



장C가 효성카톨릭대에 입학하던 당시 학교는 여대에서 공학으로 바뀐 지 2년째였다. 어느 대학보다 여자가 많았다. 그나마 장C는 통계학과에 다녀서 성비가 맞았고 공대를 제외한 웬만한 단과대에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다고 여자를 제대로 사귀어 본 것도 아니다. “선배들이 예뻐서 좋았다”는 테니스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지만 대회 나가서 맨날 죽쑤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존재감 없는 어린시절 장C, 오락실 갔다 걸려 먼지나게 맞기나 했던...

장C가 대학에 들어간 97년은 이른바 ‘연세대 사태’ 직후였고 한총련이 불법 단체로 낙인찍힌 해다. 학생회 선배들을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장C가 찾아다닐 위인도 아니었다. 여느 97학번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IMF가 터진 그 해 장C도 군대를 갔다.

복학생 장C 앞에 인터넷이 등장했다. 그리고 대형사건이 하나 터졌다. ‘안톤 오노 사건’이었다. 한국을 일순간에 반미 물결로 가득 차게 만든 이 사건은 장C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뭐 스포츠에서 저 따위 반칙을 하나.’ 장C는 인터넷을 뒤졌다. 알고 보니 미국이란 나라, 몹쓸 나라였다. 석유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너무 평범해 ‘존재감’이 없었다던 장C는 인터넷에서 급격히 존재감을 업(up)시켰다. 미국제품 불매운동 까페가 만들어졌다. 열받은 장C, 너무 열심히 했다. 대구지역 부대표를 맡은 거다. 까페 회원은 청소년이 대다수. 집회신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컴퓨터를 꽤 다룰 줄 알았던 장C의 장기가 발휘됐다. 유인물도 예쁘장하게 만들어서 청소년들과 함께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대구지역 대표가 간판집을 하는 덕에 피켓을 시트지에 뽑아서 만들 수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활동후기에 있는 어느 피켓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 우월감이 느껴질 정도다. (이 말을 할 때 장C의 눈이 빛났다. 이런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스타일인가보다.)

대구불매운동,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장C

대구에서의 미제불매운동,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장C. 대한민국 네티즌 연합 대구지역 부대표를 맡았던 장C는 인터넷을 보고 미국에 대한 환상이 확 깨졌다고 한다. 장C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국 조직이 있었는데 대구 피켓이 제일 뽀대났습니다. 대표가 간판집 사장님이라서^^"ⓒ 장C

장 C에게 한총련 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연락이 왔다. 학생회에서 통일축전 행사를 준비하는데 청소년들하고 한 꼭지를 맡아서 해줄 수 있느냐는 것. 장C와 청소년들은 그 해 여름 서울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에도 참가했다. 안티USA 페스티벌에 참가한 것이다. 그렇게 “엮이기” 시작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는 매일 종이컵을 들었다. 통일연대 사무실을 찾아갔다. 밤마다 종이컵과 초를 준비하고 앰프를 나르고, 자원봉사를 했다. 하루는 서울에 올라와서 광화문 시민공원에서 1인 시위도 했다. 그 때 찾았던 곳이 여중생 범대위 사무실. 훗날 장C는 제종철 평전을 읽고 그 때 만난 사람이 제종철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단다. 민주노동당에 들어가고 나서 그 때 마이크를 들고 선동하던 사람, ‘반미동자’가 이승헌 민주노동당 대협실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단다.

대구지역 시민단체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됐다. 임현수 선생님을 만나 청소년을 위한 ‘느티나무 배움터’를 운영하기도 했고 통일연대 사람들과 친해져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자원봉사단도 했다. 남측 응원단이 들고 있던 단일기가 북측 응원단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남측으로 넘어오는 장면이 있다. 당시 북측 응원단과 남측 응원단은 펜스로 막혀 같이 앉을 수 없었다. 단일기가 오가는 장면은 2003 대구유니버시아드의 백미 중 하나로 꼽혔는데, 그 때 단일기를 들고 있던 4명 중 한 명이 바로 장C다.

장C의 눈에 들어온 정치인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검사와의 대화’에 나온 검사들이 대통령을 상대로 “개기는” 상황을 목도한 장C. 뭘 믿고 저러는 거지? 장C는 인터넷을 뒤졌다. 우리나라 검찰의 기원과 그 간의 행태를 접했다. 장C, 또 열 받았다. 대통령 잘 뽑으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노사모에 가입했다.

대학을 졸업한 장C에게 대구는 답답했다. 정치적으로 답답했다. 장C가 자기 생각을 얘기하면 왕따 되기 십상이었다. 장C, 이번엔 무모했다.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당장 지낼 데가 없었다. 무작정 노사모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에서 숙식하면서 밤에 전화를 받아주는 일을 했다. 정성이 통했나. 어느 날 온라인 담당자가 유학을 가야 한다고 장C에게 일을 해보라고 권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았다면 안했을 지도 모르지만”, 장C는 쾌재를 불렀다.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니.’ 첫 달에 60만원을 받고 다음 달부터 100만을 받으면서 일했다.

노사모 상근자 시절 장C.

노 사모 상근자 시절 장C. 이 사진을 본 장C의 한 마디. "옆에계신 여성분이 노사모에서 제가 온라인당당을 맡던 그때 총무담당이었던 분입니다. 그 때 당시 광진노사모 회원이었는데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한번 만나서 그때얘기 실컷 하고 싶네요^^"ⓒ 장C



그리고 2004년. 장C는 노사모 사무실에서 탄핵촛불을 맞았다. 장C, 이번엔 물 만난 고기였다. 매일 노란 풍선을 들고 다니면서 보냈고 잠도 안자고 모니터에 열중했다. 그 당시 장C가 쓰던 아이디는 ‘한다솜’. 인터넷 커뮤니티 ‘서프라이즈’에선 꽤 유명한 필진으로 꼽혔다. 대구 출신인 장C의 등장 자체가 서프라이즈에서 화제가 됐다. 노사모와 서프라이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노사모 사무실에서 ‘한다솜’을 아는 사람이 꽤 많았다. 장C를 만난 사람들의 첫 반응은 ‘실망’이었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자인 줄 알았던 게다. 그래도 장씨는 20대인데다 대구라고 해서 ‘촉망받는’ 신인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번듯한 직장도 없이 사는 아들이 걱정됐던지 장C 어머니는 2005년 초 장C를 집으로 소환한다.

장C는 대구에서 전산보조원으로 1년을, 경기도 시흥에서 공장 자재과 직원으로 1년을 일했다. 가만히 있을 장C가 아니다. 주말동안 밤새 사람들을 만나고 월요일에 출근해서는 졸았다. 장C, 결국 공장을 나와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또 무모했다. 무작정 공장을 떠난 장C는 막막했다. 연이 닿은 곳이 라디오21. 넉 달 동안 몸을 맡겼다. 하지만 임대료까지 밀려 있는 라디오21에서 생활을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초등학교의 전산보조원으로 취직했다.

일한지 1년 즈음 지났을까. 광우병 촛불이 터졌다. 학교에서 소고기를 안 먹겠다고 떼쓰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있을 장C씨가 아니었다. 촛불 거리에서 섰다. 마이클럽 깃발을 들고 나갔다가 한 일간지에 실렸다. 경찰이 장C를 ‘4~50명의 여성들을 주말마다 선동해 집회에 동원했다’고 했단다. 신문을 본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왜 그만둬야 하는지 항의 한 번 못해보고 권고사직 당했다. 촛불시위에 전념하던 장C는 민주노동당 홍보실 간부에게 눈에 띄어 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안톤오노 사건부터 민주노동당까지...장C의 끝없는 ‘무모한 도전’

장C는 원래 열린우리당 당원이었다. 장C는 민주노동당에 들어오기 전 잠시 고민했다. 그에게 정당은 ‘당원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곳이다. 장C는 열린우리당에서 기간당원제가 폐지될 때 기간당원제를 지켜달라고 하다가 경찰에 쫓겨나는 치욕을 당했다. “좌절했다.” 장C는 국민참여당이 지금 대중적으로 폭발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민참여당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같은’ 사람들인데 당원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당을 이미 경험했던 터였기 때문이라는 거다.

장C는 민주노동당사에 처음 들어섰을 때 사무총장실 앞에 붙어있던 ‘투서’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당원이 당 사무총장에게 건의하는 내용이 그대로 방문 앞에 붙어있던 모습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는 장C. “열린우리당이었으면 이럴 수 있었을까. 기간당원을 지켜달라고 하는 당원들을 내쫓으려고 경찰을 불렀으니까. 배신감은 대단했어요. 정당에 입당하는 게 쉬운 게 아닌데,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공권력을 불러서 내모는 걸 보는 심정이라는 게...” 장C는 민주노동당이 ‘푸근하다’고 한다. 당원이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돼 있는 그 것 하나만으로도 좋단다.

문득 장C의 정치적 성향이 궁금해진다. 장C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제대로 ‘학습’을 받은 적도 없다. ‘오노 사건’으로 처음 세상에 눈을 뜨고, 미선이 효순이 사건, 탄핵사건을 거치면서 인터넷으로 공부하고 자기 생각을 정립해갔다. “눈앞에 있는 것들에 대해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글을 쓰고 시위에 참여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열린우리당에 들어가게 되고 민주노동당에 들어오게 됐다.”

광우병 촛불 당시 장C

광우병 촛불 당시 장C.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그 때다. 장C는 이렇게 기억한다. "집회 나가면 부러워하는 남자분들이 꽤 많았죠. 많은 여자들이랑 같이 다닌다면서;;;; "ⓒ 장C



장C는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이 좋단다. “학습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만나보고 듣는 게 좋았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살아온 얘기와 사회를 보는 관점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학습을 하게 됐다. 평전을 한 권 읽었다고 할까.” 장C는 혼자서 사람을 찾아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선이 효순이가 죽었을 때는 통일운동 단체를 찾아갔고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서 노사모를 찾아갔다. 열린우리당에 실망하고 나서 민주노동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정당을 옮겨다니는 그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장C는 ‘진짜 좋은 사람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장C가 기억하는 가장 짜릿한 장면은 2004년 말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벌일 때였다. 열린우리당 당원이었던 장C는 2005년이 밝으면 세상이 확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노무현 대통령까지 나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으니, 속된 말로 노사모들도 ‘장난이 아니었다.’ 민주노동당이 1천 명 단식까지 하면서 끝장을 보나 싶었는데, 웬걸. “트로이 목마”도 아니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발목을 잡다니. 지금도 장C는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 때 얘기를 많이 한다. “다들 그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욕한다. 전선을 흐리는 놈들.”

학습을 받은 적도, 운동권이었던 적도 없지만

장C는 "경찰이 민주노동당 서버를 해킹한" 사건이 터졌을 때 장기를 발휘했다.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민주노동당이 무슨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조직으로 비쳐질 기사들이 쏟아졌다. 보수언론의 맹공이 쏟아지던 그 때 장C는 깔끔하게 정리한 그림 하나로 사람들을 설득해 버렸다. 다년간의 경험이 당을 구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생활 1년이 넘어가는 요즘, 장C는 당에 불만이 생겼다. “사람들이 좀 자기를 내보였으면 좋겠어요. 다른 당은 사진 한 장 찍히지 못해서 안달인데, 우리는 왜 그렇게들 숨는지 모르겠네. 카메라 울렁증도 심해요. 그리고 조직명으로 게시판에 촛불후기 같은 거 올리지 좀 말았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뻔하고 재미없는 얘기만 하게 되죠. '사람 하나하나가 빛나는 민주노동당'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개인이 튄 다음에 당을 나감으로서 좌절한 기억도 있을 것이고, 변혁은 조직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각종 공안탄압에 조직적으로 맞서느라 그럴 수도 있는데, 당원 하나하나, 인물 하나 보다는 조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색깔론에 대한 대응도 좀 확실하게 했으면 좋겠단다. 위축되지 말고 누가 "넌 빨갱이다 " 라고 하면 "그래. 니말대로라면 나 빨갱이이긴 한데, 너같은 파랭이랑 내같은 빨갱이중에 누가 더 배고픈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살려낼 수 있는지 겨뤄보자" 라고 받아칠 수 있을 정도의 강단있는 모습은 보여주어야 국민들의 지지가 모일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장C. 역시 거침 없다.

장C는 인터넷이 뭐냐고 묻자 ‘흔해 빠진 말이지만’ 소통이라고 답했다. 장C에게 소통은 많이 얼굴 내비치는 것이고 잘 들어주는 거다.

최근 장C

최근 장C 모습이다. 장C는 민주노동당 홍보부장이다.ⓒ 장C

“당 지도부나 의원들이 당게에 좀 출연하면 얼마나 좋을까. 유시민, 노무현은 노사모 회원들하고 게시판에서 소통했다. 우리 당은 사람들이 관심이 적을 때는 관심 가져달라고 호소를 많이 한다. 미선이 효순이 때도 6개월 동안이나 멘 땅에 헤딩하듯 그랬다. 그런데 사람들이 확 몰려들 때는 감당을 못한다. 주장하고 싶은 것을 한 템포만 늦춰서 하면 좋겠다. 나는 미선이 효순이 죽음이 억울해서 나왔는데, 들입다 자본론 얘기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많이 들어주면 된다. 사람들 얘기들 들어보면 다 맞다. 그러면 답이 생길텐데.”

어엿한 정규직 직장을 구한 장C. 장C를 소환했던 어머니가 후회하셨단다. “그 때 끌고 내려오지 말 걸 그랬나, 2년을 손해봤네 그려.” 사실 장C씨 어머니는 절대 한나라당을 찍지 않는 분이시란다. 민주당도 별로란다. 진보적인 무소속 후보를 찾아서 찍곤 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알고 봤더니 월간 말 창간주주였다. 장C 보다 훨씬 ‘빨간색’이었다.

78년생. 이제 서른 셋이다. 어쩔까나, 아직 애인이 없다. “결혼을 절대 안하는 게 아니다. 못하는 거다. 여자가 없으니까.” 장C, 흥분했다. 흥분한 나머지 기자에게 몇 몇 여성의 이름을 댔다. (장C의 정치적 생명을 고려해, 기사화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오늘도 모니터 앞에서 장C는 ‘사람’을 찾고, 만나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고 싶은 ‘사람’을. 그래서 장C에게 별명을 하나 붙이면 어떨까 싶다. ‘인터넷 동이’ 장C는 정말 순수한 사람이다. 인터넷으로 세상을 만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뛰어든 '소년' 말이다.

<김동현 기자 mailto@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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